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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 최고의 변곡점, 애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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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변곡점, 애터미
연탄이와 함께 오솔길을 걷는다. 저녁나절, 붉은 노을을 완상하듯 걷노라면 연탄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꼬리를 치다가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닌다. 연탄이는 양계장을 시작할 때 놓고 가버린 자그마한 잡종개다. 입 주위가 새까맣다고 연탄이라고 불렀다. 처음 몇 달간은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밥을 주면 밥만 먹고는 밖으로 도는, 어찌 보면 한량처럼 자유로운 강아지였다. 언젠가는 이웃 마을 할아버지 집에 있는 닭장 앞에 놓은 덫에 걸려 3일 동안 집에 오지 못했다. 온 가족의 속을 태우고 치료하며 가족이 됐다. 그리곤 오늘처럼 내 산책길에 어슬렁거리며 같이 걸어주는 길동무 역을 곧잘 한다.
그런 연탄이를 바라보다 문득 내 삶의 궤적들이 떠올랐다. 당시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적잖은 변곡점들이 있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이었다. 항상 배고팠던 그 시절의 어느 날,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따뜻한 달걀을 훔쳐 도망쳤다. 너무나도 맛있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배가 고픈 것보다 따뜻한 달걀이 주는 만족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들키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은 평생 가슴에 뭔가 모를 죄책감으로 남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끔 가슴이 저려 온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들 그 유혹을 참을 수 있을까?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대학을 다니며 일찍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삶은 행복했지만, 가장이란 무게는 제법 무거웠다. 그 무게에 짓눌려서인지, 욕심이 많아서인지, 그도 아니면 지독하게도 운이 없었는지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집안 곳곳에 붙은 빨간딱지는 내 자신의 무능력을 새삼 일깨워 주었고, 아이들에게는 상처로 남았다. ‘겉보리 서 말 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길바닥에 나앉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며.
뭐라도 해야 했기에 처가에서 50만 원을 빌렸다. 그 돈으로 공구를 사서는 자동차도 없이 건축 인테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27년간 승승장구는 아니어도 그렇게 내 인생의 봄날을 보냈다. 적성에도 맞고 보람도 있었다. 특수전시 인테리어 전문가로 파리 루브르전을 비롯하여 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기획 전시를 하며 전국 아트홀과 컨벤션센터를 누볐다. 나름 인정받고 여유를 가졌지만, 항상 갑을 관계가 놓여져 있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페트병 뚜껑도 따지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지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란 말이 있다. 사실이었다.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지니 만사가 귀찮기만 했다. 아버님께서 치료를 위해 좋다는 약을 처방해 주셨지만, 민간요법이라 그런지 장만 망가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할 즈음, 가족으로부터 헤모힘을 전달받았다.
헤모힘은 큰 도움이 됐다. 그 덕에 조금씩 건강이 회복되고, 일상이 되돌아오기 시작했지만, 애터미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이랄까. 다단계판매에 대한 막연한 오해 때문에 가족들에게 애터미라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내가 다단계판매를 한다는 생각은 꿈에서라도 싫었다.
그러던 차, 우연처럼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사무실이 안산에 있었는데, 세월호 참사의 영향으로 지역 경기는 얼어붙고 전시 시장도 불황에 빠져버렸다.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불현듯 애터미가 떠올랐다. 내내 내 눈치만 보던 아내의 속풀이를 해준다는 핑계로 아내와 함께 변산 석세스아카데미에 참석했다. 거기서 내 인생은 또 한 번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다단계판매라고 다 같은 다단계판매는 아니었다.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판다는 전략은 경영학과 출신의 나에게 천둥처럼 다가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행한 사람은 거의 없다. 월마트가 ‘매일 더 싸게’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세계 최고의 유통기업이 됐음에도 그 속에 숨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조차도 감히 생각 못 했으니까. 그런데 애터미라는 다단계판매 회사가 그걸 하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과 함께 ‘이건 해야 돼. 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렇게 애터미 사업을 시작했지만, 애터미 사업은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사업과는 달랐다. 일종의 아노미랄까. 의욕은 넘쳤고 열정은 뜨거웠지만 간절함은 없었다. 나락에서 벗어나 제법 맑은 공기를 쐬며 살만했던 것이다. 또 하나, 그때까지 내가 해오던 방식으로는 사업에 진척이 나지 않았다. 3년여 동안 해보다가 결국 다시 아내만 애터미 사업을 하게 하고 나는 다시 양계농장을 시작했다.
안 되는 이유는 많다. 운이 없다는 것에서부터 시기를 잘못 만났다든가 하는 것 등 수백 가지는 더 댈 수 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결국은 실패했다는 것. 다시 아내와 움직였다. 하지만 삐걱대는 일상이었다. 애터미의 비전을 알고 있지만, 아내를 위한답시고 충고와 잔소리만 해대는 꼰대가 아니면 툴툴거리는 운전기사일 뿐이었다.
그렇게 애터미 사업이 바닥을 향해 소리 없이 침잠하는 와중에 나는 조금씩 애터미 사업의 실체를 깨닫기 시작했다. 애터미는 파트너와 함께 균형 잡힌 삶을 창조하는 일이다. 인맥이 없다느니, 말을 못 한다느니 이유는 많아도 함께하면 할 수 있다. 문제는 나와 함께 균형 잡힌 삶을 만들어 갈 파트너를 찾는 것이다. 리플렛을 들고 나가 모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콜드컨택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드림컨택이다. 함께 균형 잡힌 삶을 만들어 갈 파트너를 찾는 꿈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성공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또 다른 변곡점이 언제 또다시 나를 흔들지는 모르지만, 애터미를 시작하기 전의 나와 애터미 사업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많은 변화와 성장을 거쳐 온 것이다. 이제 불평불만으로 상대를 불편하고 힘들게 했던 나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애터미 속으로 푹 빠져, 파트너와 함께 만들어 가는 맨토피아의 세계로 나가려 한다. 연탄이와 함께 하는 산책길, 내 머릿속에는 핸델의 사라방드 곡조가 흐르고 있다.
이정재
샤론로즈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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