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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람이 불어도 가야만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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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도 가야만 하는 길
나는 남편을 중매로 만나게 되었는데 구남 삼녀 집안의 열 번째 아들이었다. 열 번도 채 만나지 않고 3개월 만에 결혼하게 되었는데 처음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맞벌이했으면 하기에, 나도 일하는 걸 좋아한다며 그렇게 하기로 했었다. 남편은 십 대부터 사회생활을 하며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고 혼자서는 사는 게 녹록지 않을 것을 이미 깨달았던 것 같다.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개월 된 아들을 전 시간 놀이방에 맡기고 보험회사에서 보험 설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학습지 교사, 화장품 방문판매 영업사원으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대여섯 개의 네트워크마케팅 사업도 경험했다. 그러나 결국 빚만 지게 되어 또다시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보험업으로 돌아가야 했다. 투 잡 쓰리 잡에 알바까지 하며 열심히 살았으나 빚은 점점 늘어만 갔고 결국 전세를 빼서 빚을 갚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돈으로는 빚 일부만 갚을 수 있었고 주거비를 줄여 구석진 시골의 한 주택을 월세로 얻어 거기서 7년을 살아야 했었다.빚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기나긴 터널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미용실에서 애터미 리플렛을 받게 되었다. 그때 저장해 놓았던 전화번호로 화장품을 사기 위해 연락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분과의 관계가 이어져 갔다. 딱 한 번만 들어보고 골드 소비자만 되어달라는 그분의 끈질긴 세미나 초대에 나는 결국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애터미가 타 네트워크 회사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부업으로 보험 고객과 지인들을 가입시키며 소비자를 만들어나갔다. 11시 이전에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저녁 늦게까지 장사하는 지인들을 만났다.
판매사 도전도 하게 되었는데 얼마나 정신없이 다녔는지 자동차 보험 만기가 지났는지도 모르고 라면 두 박스를 소개받고 전달하러 가다가 무보험 차량으로 걸리게 되어 그 당시 직급 수당과 같은 금액인 벌금 45만 원이 고스란히 날아가기도 했다. ‘나한테는 돈 들어오는 꼴을 못 보는구나!’ 하고 스스로 낙심했었던 그 씁쓸한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친정과 시댁 식구들은 거의 소비자조차 되어주지 않았다. 자본 투자 하나 없이 마이너스 상태에서 판매사, 팀장, 국장까지 어떻게 왔는지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기적만 같다. 그 상황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주문해 주는 소비자가 감사했다.
좌측은 오토가 되고 우측을 200만PV까지 전달해서 올라가고도 50만PV를 채우지 못해서 판매사 유지를 못 할 때는 지옥으로 곤두박질치며 가슴이 아려왔다.그러나 그런 환경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유치원 조리사 언니가 가입한 후 계속 소개를 받아 유치원 기사, 택시 기사, 버스 기사로 이어지다가 그분의 배우자를 통해 요양사 한 분이 파트너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3개월간 세미나를 참석하다가 “저는 오토 소비자 할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이사하고 취업을 했다.

꾸준한 후속 관리 때문이었는지 그분은 2년 만에 다시 전업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 가족들이 함께 애터미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측 라인도 조직이 커지며 나는 오토판매사가 되었고 2019년부터 전업으로 애터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들의 인맥으로 미국에도 소비자가 있고 라인마다 중국인 파트너들이 중국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그 많은 일을 하며 아무것도 성공한 것이 없고 인생의 패배자로 살았던 나였는데 애터미에서는 먼지 같은 적은 노력도 헛되지 않고 대가가 돌아오는 것을 느낀 적이 많다. 깊은 늪에서 서서히 올라올 수 있게 해 준 애터미, 지치지 않게 희망을 품게 해 준 고마운 소비자들, 다시는 이런 거 안 한다고 고집 피웠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초대해 주셨던 스폰서님, 그리고 스폰서 같은 마인드 좋은 파트너들 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저 감사, 또 감사의 마음뿐이다. 남편의 어깨를 가볍게 해 주고 싶었지만, 더 무겁게만 했던 현실의 죄인처럼 자존감이 낮아 있었던 내가, 이제는 마지막 직업으로 애터미를 취미처럼 즐겁게 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철강을 배달하는 남편의 직업을 바꾸어 애터미 부부 사업자로 만드는 아내, 엄마에게 효도하는 딸, 아들에게 존경받는 멋진 엄마, 그리고 동생들에게는 도움을 주는 언니, 누나가 되고 싶고, 주변 지인들에게는 “열심히 살더니 결국 해내셨군요! 해낼 줄 알았어요!” 하는 그 말을 듣고 싶다.“희망이 없을 때의 유일한 희망은 희망을 품는 것이다”라는 박한길 회장님 말씀처럼 나 역시 애터미를 희망의 도구로 잡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코로나 19로 인해 큰 세미나와 미팅은 불가능하지만, 소규모 미팅과 온라인을 통해서 애터미는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나 또한 함께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어차피 써야 하는 생필품을 품질이 좋고 저렴해서 자발적으로 재구매하기 때문이다. 끝이 있고 은퇴가 있는 멋진 애터미, 시간적·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모두 함께 정상에서 만날 수 있는 집단의 성공이 가능한 애터미임을 알고 있기에 내 가족의 창조적 소수가 되어 가족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전파할 것이다. 애터미 본사 앞에 세워진 동상처럼 힘 있게 주먹 불끈 쥐고 달려야 한다. 어떤 역경이 와도 역경지수가 높은 애터미 회사와 발맞추며 나 역시 바람이 불어도 가야만 한다!확실한 정상이 저기 보이는데 나의 노력이 절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한 걸음 더 전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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