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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비상의 날갯짓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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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의 날갯짓을 시작하다
2012년 2월의 끝자락. 애터미가 봄바람을 타고 서둘러 나에게 왔다. 회원 가입 후 옷 가게를 운영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애터미 제품을 알릴 수 있었다. 한동안 포부를 안고 사업을 펼쳐나갔지만, 지방으로 이사를 오면서 그 일을 내려놓게 되었다.
7년을 흘려보냈다. 그동안 신선놀음에 빠져 도낏자루 썩는 줄 몰랐다. 주부모델을 겨냥한 미인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얻을 수 있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평생 꿈으로서만 끝날 뻔했던 에세이 작가로 등단하였고, 역량 있는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작품 속 캐릭터에 감정이입 되어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보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베스트셀러를 쓰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밤잠을 설치곤 하였다. 때때로 남편이 운영하는 공장에 나가서 가끔 말벗이나 해주는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폭풍전야의 고요였을까? ‘코로나’로 세상이 멈춰버렸다. 생각이 멈추고 기울어진 일상의 연속이었다. 중국과의 계약이 줄줄이 틀어지면서 일이 뚝 끊겼다. 2년간 간신히 버티다가 결국 공장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경영난에 부딪히자 우선 직원들을 내보내야 했다. 회사법인 명의로 된 차를 빼앗기다시피 반납하고 나서야 날벼락 맞은 현실에 불안한 미래가 더해져 매일 떨게 했다. 당장 빚 독촉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실에 막막했고, 우리 부부에게 노후 걱정은 사치였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가을바람처럼 소슬해졌다. 말수가 줄어들고 어쩌다 나누는 말 한마디가 날 선 검이 되어 서로의 속을 후벼팠다. 그 때문인지 남편은 지방 여기저기로 일거리를 찾아 헤매었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던 어느 날. 간혹 연락해 오던 상위 스폰서를 포함해서 세 명이 나를 찾아왔다.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였다. 평소 같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문자나 전화로 안부를 묻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때가 되었는지 천안에 내려온다는 말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다. 현실 도피라도 좋았다.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길 바랐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들을 보리밥집으로 안내했다. 허기를 채운 후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세 사람은 애터미 사업에 대해 말하면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목젖을 보이며 깔깔거리는 그들은 영락없는 여고생들의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머릿속에 문득, 저들의 무리 속에서 나도 함께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애터미 회사소개 영상을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사뭇 달라 보이는 눈부신 성장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애터미 사업을 하고 안 하고 상관없이 회사는 성장하고 있었구나! 그 열기에 나도 빨리 합류해야겠다고 느끼는 동시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3일 밤낮으로 고민한 후, 애터미 사업을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다음날부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온라인 쇼핑몰을 오픈했다고 광고에 나섰다.
애터미 사업을 다시 해보려고 마음먹었을 때 주변의 반응이 그리 좋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이었다. 특히 가족들의 반대가 매번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언니들이 소나기처럼 쏟아붓는 독설은 극에 달했다. “너를 빨리 그만두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물건을 사주지 않는 것이다.” 등등의 말로 나의 기세를 매번 꺾어버렸다.
반대를 뒤로하고 앞만 보고 달렸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8개월가량을 천안에서 당진으로 후원을 다녔다. 늦으면 자고 다음 날까지 소비자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왕복 두 시간 거리를 운전하면서 신에게 떼를 써보기도 하고, 파트너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이것저것 궁리를 하다 보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한창 열정을 가지고 사업을 하던 중 친정엄마를 모시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어머니를 모시면서도 동분서주 사업을 진행하던 중 울산에서도 파트너가 생겼다. 대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애터미 제품을 권유했는데 단지 다단계라는 이유만으로 졸업할 때까지 거절을 해왔던 동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고단한 삶을 살아오던 그는 최근에 트럭운전을 하면서 무릎관절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자, 수술 여부를 두고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터닝 포인트가 절실히 필요해 보였던 때였다. “애터미 사업 같이하자. 같이 성공할 수 있을거야.” 진심이 닿았던 순간이었다.
사업에 매진하던 중 무엇에라도 홀린 걸까. 3개월 후에 다이아몬드가 되겠다고 선포하는 일이 생겼다. 당장은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목표가 생기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사업에 초집중할수록 간절함이 점점 더해졌다.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했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닫혔던 마음의 빗장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연이었다. 해마다 두 번씩 타사 홍삼으로 명절선물을 해오던 지인들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빗발쳤다.
“헤모힘 60박스, 홍삼단 60박스 주문할게요.”
그렇게 나는 다이아몬드마스터가 되겠다는 선언을 현실로 이뤄냈다.
좌청룡! 우백호! 이제 양 날개를 달았으니 다시 한번 드높이 비상할 때이다.
이미령
다이아몬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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