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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오리가 부화할 때까지 기다려라

조회수 2,571 촬영일(노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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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연의 경제이야기]



원나라 말기 천하의 주인자리를 놓고 빈농출신의 주원장(朱元璋)과 소금장수 출신 장사성(張士誠)이 자웅을 겨뤘다. 주원장의 부대는 장사성의 부대와 강소(江蘇) 땅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주원장이 장사성의 주력부대를 포위하고자 장사성 부대의 후방으로 우회할 때의 일이다. 험악한 산을 넘어 좁은 계곡 길을 숨어드는데, 이 협곡의 외길 복판에 산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었다. 그를 두고 주원장은 갈등이 생겼다. 주원장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절에 들어가 몸을 의탁하면서 걸승(傑僧)으로 지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새끼를 품은 짐승을 해치면 업보(業報)를 받는다’는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알을 품고 있는 산오리를 보자 그 가르침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에 따라 주원장은 진군을 유보한 채 오리가 새끼를 부화시켜 제 발로 비켜줄 때까지 여러 날을 기다리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그까짓 산오리 한 마리 때문에 진군을 멈추다니!”하며 일부 부하들은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으나 주원장은 묵묵히 참고 여러 날을 기다렸다. 물론 작전은 탄로 나고 전세(戰勢)는 불리하게 기울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예상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적진에서 부장(副將)들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투항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주원장의 진영에서는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부대는 훨씬 강했고 유리한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천하를 얻느냐 잃느냐 하는 그 큰 전쟁에서 한낱 오리의 생명을 위해 전쟁을 유보하는 인간적인 장수라면 그 휘하에 들어가는 편이 옳고 장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끈기 있게 참을 줄 아는 힘이 화살 한 번 쏘지 않고 전쟁을 이기는 원동력이었던 것이고, 천하를 얻었던 주원장의 리더십인 것이다.

17세에 부모, 형제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절에 들어갔으나 절 역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떠돌아다니며 노숙하고, 음식이나 돈을 탁발(托鉢)하는 거지와 다름없는 어려운 생활을 했던 주원장이 천하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감성적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젖소철학 vs 애기철학
요즈음 서점에는 리더십에 관한 서적들이 널려 있다. 이것은 그만큼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증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리더십에 대한 견해가 구구각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대부분의 리더십에 관한 책들은 어떻게 하면 눈앞의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느냐는 다분히 방법론적 테크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종업원들이나 부하들의 동기유발에 관한 방법론들은 대부분 그럴 듯한 미사여구로 포장되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젖소철학’이다. 즉 보다 많은 젖을 짜기 위해 젖소를 잘 먹이고 보살피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진정한 리더십은 ‘젖소철학’이 아니라 ‘애기철학’에서 나온다. 분명이 젖소를 잘 먹이고 보살피는 것과 애기를 잘 먹이고 보살피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행위는 같지만 그 ‘마음’이 다른 것이다. 곧 감성(感性)이 다른 것이다. 부하의 감성을 움직이는 리더십이라야 부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이성(理性)은 감성의 작용을 이기지 못한다. 이성보다 감성이 인간의 행동에 직접적이고도 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감성적 리더십의 요체는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 심지어는 적마저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명나라 태조로 등극한 이후 정치이념이 다른 정객들까지도 대화와 포용으로 균형을 도모해 나갔다. 

나아가서는 반원주의(反元主義)를 이념으로 명나라를 세웠음에도 원나라 황제를 순제(順帝)로 우대하고, 몽골인을 발탁하고 몽골문화를 수용, 균형을 잡아 갈등을 해소했다. 100만명에 불과했던 만주족이 중원을 정복해 세운 청나라가 그토록 번성했던 것도 바로 이 포용정책 때문이었다.

정적마저도 포용해라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정부의 주요한 요직에 추천된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워싱턴의 친구였고, 다른 한 사람은 매사에 자신을 비판하던 정적(政敵)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예상과는 달리 자기의 정적을 요직에 임명했다. 워싱턴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인적으로는 친구를 등용하고 싶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편파적인 인사를 할 수는 없는 것이지.” 왜 워싱턴이 그토록 존경을 받는지, 왜 미국이 선진국이 되었는지 알 만하지 않은가?

처칠과 루스벨트도 “뉴 리더십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은 물론 정적마저도 포용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항상 거국적인 인사를 했다. 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리더십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만하다.

감성적 리더십, 그리고 포용의 리더십은 일시적으로 지어먹은 마음에서는 우러나오지 않는다. 인격적 성숙과 마음의 공간이 넓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두루 사귀되 편당 짓지 아니하고, 소인은 편당 짓되 두루 사귀지 아니한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論語 爲政篇).’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의 행동을 명쾌하게 대비시켜주는 말이다. 우리사회가 조직의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인사문제로 항상 시끄러운 것은 주이불비(周而不比) 하는 군자보다 비이부주(比而不周) 하는 소인배가 많다는 것을 나타낸다. 리더계층에 주원장과 조지 워싱턴, 그리고 처칠과 루스벨트 같은 포용력을 지닌 인격자가 많아질 때 비로소 선진조직, 선진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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