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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구슬에 실을 꿰다

조회수 5,514 촬영일(노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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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연의 경제이야기]
 
 
 공자가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면서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에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 진기한 구슬을 얻었는데 아홉 구비가 구부러진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구슬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지만 구멍이 직선으로 뚫려 있지 않고 구슬의 속에서는 아홉 번 구부러져(九曲)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실로 꿰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나 성공할 수 없었다. 박학다식한 공자도 구슬에 실 꿰는 간단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문득 바느질하는 아낙네라면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근처에서 뽕을 따고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密爾思之 思之密爾).’ 공자는 조용히 생각한 끝에 그 뜻을 깨닫고는 개미를 잡아다가 개미허리에 실을 매었다.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 넣고 다른 쪽 출구가 되는 구멍에 꿀(蜜)을 발라서 개미를 유인했다. 마침내 허리에 실을 맨 개미가 출구로 나왔다. 그토록 꿰어 보려고 하다 실패했던 일을 아낙의 힌트와 개미가 해낸 것이다. 공자는 아낙이 일러준 밀(密)에서 꿀(蜜)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고사(故事)에서 공자천주(孔子穿珠), 곧 ‘공자가 구슬을 꿰다’라는 사자성어가 만들어졌다. 이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가르쳐주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공자 같은 지성인도 구슬에 실을 꿰는 문제는 바느질하는 아낙보다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이기도 하다.
 
남북조시대 송나라 문제(文帝) 때 심경지(沈慶之)라는 백전노장이 있었다. 그는 10대 초반부터 전쟁터에 나가 많은 전공을 세운 장군으로 변경수비를 총괄하기도 했다. 이 무렵 문제는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와 강남의 땅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태무제가 몽골 땅의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인 유연(柔然)을 공격하자 문제는 권신들을 불러 북위에 대한 공격문제를 논의했다.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문신들은 이구동성으로 북위를 제압할 수 있는 기회라며 공격하는데 찬성했다. 이를 지켜본 심경지는 문제에게 간언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자세히 따지면 가정을 다스리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무릇 농사짓는 일은 당연히 남자 노비에게 물어야 하고 배 짜는 일은 당연히 여자 노비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북위를 공격하려고 하시면서 백면서생들과 논의하시니 어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耕當問奴, 織當問婢, 陛下今欲伐國而與白面書生謀之, 事何由濟)?” 그런데 문제는 심경지의 간언을 묵살하고 출병했는데 송나라의 군대는 북위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이런 고사에서 경당문노(耕當問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밭가는 일은 당연히 사내종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으로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세상사는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글만 읽었지 세상 경험이 전혀 없는 풋내기를 이르는 말인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는 고사성어도 심경지의 이 말에서 유래했다.
당나라의 제2대 황제가 태종 이세민(李>世民)이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제위(帝位)에 올랐으나 현군(賢君)으로 이름나 있다. 그가 현군이 된 것은 현신(賢臣)들의 간언(諫言)을 경청했기 때문이다. 제위에 오른 태종은 우선 현신들을 임용해 유사 이래 가장 영명(英明)한 시대를 열어나갔다. 이 중 대표적인 현신이 위징(魏徵)이라는 인물이다. 위징은 태종에게 200회가 넘는 간언을 올렸다. 심지어는 태종이 화를 내는 상황에서도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다음해 태종이 위징에게 물었다. “무엇을 일러 현명한 군주(明君)나 어두운 군주(暗君)라 하는가?” 위징이 대답했다. “군주로서 명(明)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겸하는 것을 말하며 암(暗)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 말만 믿는 것을 말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옛 사람이 말하였지 꼴꾼, 나무꾼에게도 묻는다’라 했습니다. 옛날 요·순 시대에는 사방의 문을 활짝 열고 사방 모든 사람의 밝은 눈을 받아들였으며 사방의 총명함을 모두 활용했습니다. 이 까닭으로 그 성스러움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어 공공(共工)과 곤(>)의 무리들도 임금의 이목을 막을 수 없었고 공손한 말이나 사악한 말일지라도 임금을 미혹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 2세 황제(胡亥)는 자신을 감추고 숨기기에 바빠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 자는 버리고 신분이 천한 자는 멀리하면서 조고(趙高)만을 치우치게 믿었다가 천하가 무너지고 민심이 이반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어볼 수 없었습니다.” 위징의 말은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서로 다른 의견을 널리 들으면 현명한 군주가 되고 한쪽 말만 믿으면 어두운 군주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로 경청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공자가 아낙에게 물었듯이 하잘것없이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의견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그는 밝은 리더가 된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거나 아부하는 사람의 말만 들으면 어두운 리더가 된다. 이런 리더가 있는 조직은 쇠락하다가 결국은 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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